세상소식

‘박영석 사망’이라고 말해야…

양산 작은 거인 2011. 10. 27. 16:14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박영석 대장(48)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등반 중 2명의 대원과 함께 눈사태로 실종됐습니다.

 

 지난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 중 오희준,이현조 대원을 잃고 실의 빠졌던 그를 네팔에서 인터뷰했던 인연이 있는 저로서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약간의 희망을 언급하며 구조작업 상황을 속보로 내보내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상 사망확실’이라고 일단은 매듭을 짓고 수색작업을 벌여야한다고 봅니다.

 

10월27일 조선일보 1면에 안나푸르나 등반 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37),강기석 대원(33) 수색작업 사진이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눈사태로 휩쓸려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빙하와 암벽사이 거대한 틈 ‘베르크슈룬트’를 수색하는 장면.


 

*목숨건 수색작업


 이번 수색작업이 얼마나 위험하며 실종된 산악인들이 갑자기 어떤 사고를 당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 생존가능성 없다”고 누군가는 말해야한다고 봅니다. 언론이나 실종자 수색에 나선 산악인들은 “단 1%의 가능성을 들어 생존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저는 0%로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산악인 박영석 개인으로 보면 죽음을 모르는 ‘불사조’였지만 이번은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도.....


 박영석팀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남벽 신루트’개척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왼쪽부터 신동민,강기석,박영석 대장


  지난18일 오후 정상공격 중 “눈사태로 하산한다.어려움이 많다”는 교신을 끝으로 연락두절. 다음날부터 수색에 나섰지만 로프만 일부 발견된 후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요. 벌써 실종 만10일이 됐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했던 산악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수습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나마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번 같은 눈사태로 인한 사고는 눈사태직격탄을 맞기 때문에 압사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그 규모와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의 마지막 모습조차 못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엄청난 눈들을 삽으로 파낸 수도 없고 중장비를 사용할수도 없는 형편.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크레바스에 빠졌을 경우.



 

이 경우도 생존 가능성이 낮은 이유는 그 속이 영하 수십도의 ‘냉동창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온력이 좋은 전문등산복을 착용했더라도 하루 이상을 버티기 힘든 조건이지요.


 박영석 대장과 두 대원이 눈사태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이 있긴 했습니다. 그 기간은 단 하루. 구조대가 발견해 구출할 경우나 본인들이 눈 속에서 자력으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없었으니 사망했다고 봐야 겠지요.


 또한 등반 중 기술적인 문제, 즉 로프가 끊기거나 풀리는 등의 경우라면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눈사태라는 자연재해와 관련된 사고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히말라야 고산에서 당하는 인명사고는 눈사태를 당하는 게 가장 큰피해를 주고 쌓인녹 속에 생긴 크레바스에 빠지는 사고,쎄락(얼음탑)이 떨어져 생기는 사고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통상 정상공격은 새벽 1~3시에 시작하는 데 그 이유는 등정 도중 녹이 녹으면서 발생할 사고 가능성을 줄이려는 목적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박영석팀의 사고가 국내 산악계의 미치는 영향도 지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산악계에서 인정해주는 박영석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10년 이상 국내 산악계의 얼굴이 되줄 든든한 허리였던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함께 잃었기 때문입니다.


 박영석이 히말라야 8천m 이상 14좌를 완등하고 남․북 극점을 탐험에 성공, 산악그랜드슬럼을 이룩한 불세출의 스타 산악입니다.

 그는 2006년 에베레스트 북쪽(티벳)으로 정상에 올랐다가 남쪽(네팔)으로 내려오는 횡단등반을 성공했지요.


 박영석이 최고산악인 이유는 남들이 하지 않은 신루트 개척에 겁 없이 뛰어든 진정한 도전정신에 있습니다.

 지난2007년 세계 3번째로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가 혈육과도 같은 오희준,이현조 2명을 잃고 다음해 재도전에 나섰다가 실패 한후 2009년 이번 함께 실종된 신동민,강기석과 함께 성공하고야 말았지요.

 절벽에서 줄에 매달려 비박을 하며 새루트를 개척하는 등반은 목숨을 건 자만이 가능한 것이지요.

 이번 안나푸르나 등반도 신루트 개척을 위해 진행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엄홍길,허영호,한완용 등 히말라야 14좌를 정복하고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는 산악인들이 있지만 산악전문가들에게 누가 최고냐고 묻는다면 박영석을 꼽힌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박영석은 등정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남들이 꺼리는 위험한 방법,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려는 등로주의(登路主義),진정한 알피니즘에 충실한 산악인이었지요.

 

 저와 친분이 있는 산악인 이상배는 침통함에 말을 잃었습니다.


  

 

*2006년 에베레스트에서 박영석과 함께한 이상백(오른쪽)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 중 만난 박영석은 목이 완전 쉬 상태에서 이상배에게 “형님 날씨가 장난이 아니니 몸조심 하세요”라며 격려해줬답니다.


둘은 자주 히말라야 고봉 등반도중에 만나고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유지했었지요.

 그는  “박영석은 여러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불사조였다.진정한 산악인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다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2007년 이상배씨가 에베레스트 북릉을 통한 등정성공 당시 단장 자격으로 네팔에 갔다가 박영석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박영석이 절친인 앙 도르지에게 운영을 맡긴 카투만두 시내 식당에 우연히 식사를 하러갔다가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등반중 오희준,이현조 두명을 잃고 괴로워하던 당시 였습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아우들.


 제가 앙 도르지를 통해 전체팀원에게 식사를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더니 정중하게 거절하는 대신 인사를 왔더군요.

 머리를 빡빡 밀고 식사를 몇끼나 거른 상태였습니다. 먼저 보낸 아우들을 되새기며 눈물이 콧물과 범벅이 됐지요.

  같은 비행기로 귀국해 다음날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김해공항을 통해 양산으로 귀향했었지요.

 

 생전에 박영석은 2007년 사고를 당한 두명 이외에도 1993년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당시 남원우 안진섭 대원을 잃었고 브로드피크에서 허승관,K2에서는 박영도 대원을 잃었다.

또 숱한 셀파의 죽음을 목도해야했다.


 항상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는 “산사나이가 산에서 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며 자신에게 닥칠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하는 듯 했다.


 다음은 참고로 2007년 제가 쓴 박영석 관련 블로그 글을 첨부합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 개척에 또다시 도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박영석의 '네팔 카투만두 선언'을 고국에 전합니다.

 박영석 그가 누구인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산악인.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하고 세계 7대륙 최고봉과 에베레스트, 남극, 북극을 포함한 3극점에도 도달했다.

 명실상부한 ‘산악그랜드슬럼’을 이룩한 위대한 산악인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인 그가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져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대장으로서 지난 16일 사고로 인해 오희준 부대장(37)과 이현조 대원(35)이 사망한 것.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2명의 대원을 화장한 후 귀국을 준비 중인 박영석 대장을 네팔 카투만두에서 만났다. 그와의 조우는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나는 26일 귀국 전에 그를 만날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박영석팀이 묵고 있는 빌라 에베레스트 식당인근에 나의 숙소인 보느 린카 호텔이 있었던 것.

 ‘2007 초모랑마(에베레스트 티베트 말) 양산원정대’단장인 나는 정상을 정복한 이상배 대장의 귀환을 기다리던 중이어서 빌라 에베레스트 식당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던 것.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귀국을 앞두고 있는 박영석 대장과 첫 대면을 하게 된 것.

 그는 팀원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렵게 그의 절친한 친구인 빌라 에베레스트 주인 ‘앙 도르지’를 통해 인사를 청했다.

 

한국어 간판,  태극기를 그려 놓은 빌라 에베레스트 대문(위) 정원이 멋진 식당 외부.


  박영석이 내 자리로 옮겨왔다.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먼저 간 대원들에게 속죄하려는 듯 그는 평소와 달리 머리와 수염을 빡빡 깎았다.

 자연스레 비공식적인 인터뷰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중요한 몇 가지를 물었고 현재의 슬픈 감정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는 형식이었다. 대답은 짧았다.

 현장에 나는 디카를 가지고 있었지만 차마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말은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는 상당히 움츠려 있었다. 그래서 인터뷰 사진은 없이 자료사진과 주변사진으로 대체한다.

 

 지난 21일 라마사원에서  두 대원을 화장하는 자리에서 오열하는 박영석


 살아남은 대장의 슬픔은 어떨까?


 “이런 생활(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산악인)이 죽도록 힘든 일의 연속 아닙니까. 동생들에게 살아 생전에 잘해주지 못한 게 못내 한스럽습니다”

 금방 눈가에 이슬이 맺힌 그는 에베레스트에 죽은 오희준 부대장과 이현조 대원을 동생이라고 불렀다.

 “동생들과 함께 살던 서울 월곡동 집을 처분하고 작은집으로 옮겨야 겠습니다. 이제 큰집에 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박영석은 오희준, 이현조와 10여년간 같이 살았다고 한다.그들을 히말라야에 입문 시킨 당사자이며 수많는 고봉과 남극, 북극 등을 함께 다녔다.

  

 박영석은 죽은 동생들을 “대한민국 산악계의 큰 산맥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제 40대 후반인 자신과 50대인 엄홍길의 대를 이을 30대의 한창 나이에 그들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동생들에 대한 인간성에 대한 박영석의 대답.“불평 한마디 없이 워낙 착했습니다”산을 닮아서일까. 동생들은 순한 양같았다고 했다.

 실제 사진을 보면 2명은 매우 거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외양이 우락부락한 사람은 마음은 순하다고 했는데 그랬을까?


 

"동생들은 정말이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오르고 싶어 했습니다. 눈사태에 묻혀버린 신루개척은 또다시 할 겁니다”

 

 


  박영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구나.

  결코 주저 앉지 않았구나.

  다만 슬퍼할 따름이다.


 박영석의 네팔 다짐을 들으면서 그가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를 하게 됐다.

 그는 죽은 동생들의 몫까지 합쳐서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위의 사진 2장은 고인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신루트를 개척할 때의 모습이다. 셀파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힘겹게 코리안 루트를 성공하려다 그들은 영원한 에베레스트인으로 남게 됐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10여분의 시간 동안 박영석의 얼굴에는 회한이 넘쳐 났다. 실패한 패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1993년 그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했다.

 지금은 슬픔은 14년전 그때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훨씬 더한 듯 했다.

 

 박영석 대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2007 초모랑마(에베레스트) 양산원정대' 이상배 대장은

"에베레스트에서 사고는 흔히 일어나는 것이나 그 피해가 심각하면 대장이 욕을 얻어먹는게 우리나라 산악계의 현주소"라며 "나도 2번의 실패 끝에 3번째 도전을 해 지난17일에야 정상에 섰듯이

그가 도전을 계속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상배 대장은 또 "값비싼 희생에도 불구하고 박영석과 같은 선도적인 산악인 도전과 개척을 해야만 세계의 산악문화는 발전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다시 일어서는 박영석.

 친구들이여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시다.


 그는 5월 26일 자정께 대한항공편을 통해 인천공항에 대원, 유족, 네팔까지 찾아온 지인들과 함께 귀국합니다.